지난 주일 3부 예배 찬양팀이 부른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살 수 없을까?” 가사를 가지고 제가 설교를 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살아요. 예수님 우리 죽을 죄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 죽으셨으니 우리는 천하 가장 행복하게 하나님 사랑과 은혜안에서 살아야죠”라고 했었습니다. 다른 것 아닙니다. “일반 종교가 ‘하라(Do)의 종교라면 기독교는 ‘하셨다’(Done)의 종교”(마크 미텔버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에 우리가 사는 것이고, 죽음 권세를 이기셨기 때문에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부활 승리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를 할 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라는 강요하는 말(ought to language)을 잘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은혜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말도 율법이 될 수 있습니다. 찬송가 ‘구주를 생각만 해도’ 가사 가운데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라는 구절이 은혜가 우선임을 말해줍니다.

좋은 물건을 담는 그릇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릇이 좋아도 담겨있는 내용물이 중요합니다. 기독교 윤리 기초 질문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당신이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수술하는 의사를 결정할 때 착실한 기독교인이지만 손이 떨려서 수술을 잘 못하는 사람과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수술을 잘하는 의사 둘 중 누구를 택할 것인가?” 당연하게 그 사람의 종교를 보지 않고 그 사람의 실력을 보고 선택합니다. 물론 믿음도 좋고 실력도 좋으면 금상첨화입니다.

오늘 교회력 설교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교만한 바리새인의 기도가 아니라 자기 죄로 인해 애통하며 기도하는 세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의롭게 여김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온통 이런 내용입니다. 교회라는 곳이 하나님 은혜를 사모하며 세리의 기도를 드릴 줄 아는 사람들, 용서받은 죄인의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바리새인은 예배와 십일조 철저하게 지키는 신앙인들입니다. 대부분 오늘날 교인들 바리새인의 종교 열심 수준에 이르지 못합니다. 바리새인 수준 근처에도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바리새인 흉내내는 모습들이 참 많습니다. 못난 사람이 교만하고 무례하기까지 하면 고치기 어려운 조합입니다.

계절이 변하면서 옷장을 정리하다 보니 아낀다고 입지 않던 옷들 좀이 먹은 것이 여러개입니다. 좋은 커피 선물 받은 것도 누구 준다고 하다가 잊어 먹어서 향이 다 날라간 것들이 있더군요. 제가 인생을 그렇게 살아왔다는 생각에 반성을 했습니다. 좋은 것 있으면 먹지 않고 간직해 둡니다. 그리고는 잊어 먹습니다. 나도 못 먹고 못 쓰고 남에게도 주지 못하고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못난 노릇입니다. 그때 그때 먹거나 나누어 주거나 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 구주로 영접하고 천국을 사는 행복한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4:21에 보면 예수님은 희년목회를 선포하시고 말씀을 듣는 자에게 지금 이루어졌다고 하셨습니다. 예배 드리는 가운데 천국을 사는 것이고 말씀을 듣는 자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교단 문제로 이런 저런 많은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지금 여기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림이 없고 예수 잘 믿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감도 못 잡는 사람들이라면 여기나 저기나 아무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못된 짓 저기서 못난 짓 하느라 교회 피곤하게 하고 자기 인생 망칠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노력이 예수 잘 믿기 위한 목적이어야 합니다.

먹을 것이 없는 삶의 현실에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남편 아닌 남자 6명을 바꿔 살아야 했던 불행한 우물가의 여인이 복음을 증거하는 거룩한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세리 삭개오는 온 집안이 구원받았습니다. 간음하다 끌려온 여인이 용서받았습니다. 병자들이 고침 받았습니다. 사탄마귀 권세가 물러갔습니다. 자기 이름을 모르고 무덤가에 살던 젊은이가 제 정신차렸습니다. 죄인들이 구원받았습니다. 지옥 같은 인생 살던 사람들이 천국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영접하니 변화된 거룩한 구원받은 인생들입니다. 예수 잘 믿는 것 아닌 다른 것으로 교회가 바쁘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노릇인가요.

얼마전에 “어떻게 하면 후러싱제일교회가 교단을 나가지 않고 남아있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제 답은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 ‘어떻게 하면 후러싱제일교회가 예수 잘 믿고 예배 잘 드리는 교회가 될 것인가?’라고 질문하라”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