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30대 초반에 시카고 지방 성직위원회 위원장을 했습니다. 80년대 당시 북일리노이 연회에서는 소수민족 리더쉽 세우는 것을 우선순위로 했기에 모든 위원회의 위원장 과반수를 여성과 소수민족 목사로 세웠습니다. 리더쉽이 출중한 선배목사들이 어린 나를 세워놓고 존중하면서 잘 훈련시켜주었습니다. 저는 성직위원들에게 목사후보생들에게서 봐야 할 세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첫째, 애매모호한 상황(ambiguity)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리더쉽입니다. 둘째, 이론과 실제를 연결해 내는 능력입니다. 셋째는 자기가 성직자라는 것에 대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푼수 기질이 없어야 합니다.
30여년도 넘은 시절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 세 가지가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엇보다 지도자에게 중요한 것은 분별력입니다. 어떤 사안은 분명하게 판단되는 것들이 있지만 어떤 것들은 좌우사방과 아래 위를 잘 살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처해 있는 상황이 다를 수 있고 경험과 생각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연합감리교회가 지난 수십 년 동성애자 목사안수 문제로 치열하게 싸우다가 이제는 진통을 겪으며 분리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한인교회가 최전방에서 교단분리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처한 상황이 다릅니다. 쉽게 건물을 가지고 나가도록 하는 연회가 있는가 하면 나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연회가 있습니다. 어떤 연회는 조건 자체를 정확하게 제시하지 않고 엿장수 마음대로 하기도 합니다. 어떤 교회 교인들은 신앙의 성향이 같은가 하면 어떤 교회는 다양합니다. 참으로 모순적인 것이 보수성이 강한 연회가 그동안 인종과 문화적 이해가 부족했는데 오히려 한인교회들이 쉽게 나갈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진보연회들은 한인교회들이 교단에서 나가려고 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대부분 진보연회 소속 큰 교회들이 한인교회들입니다. 참 어렵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연합감리교회 가장 큰 문제가 제도교회를 지키는 훈련은 잘 받았는지 모르지만 신학하는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교단 법 ‘장정’에 보면 목사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책임이 ‘신학하는 일’(Theological Task)입니다. 몇 주 전에 드루신학교 한인학생회 주관 예배 설교를 하고 교수들과 대화를 하면서 저는 오늘날 신학교에서 제대로 된 신학을 가르치느냐고 도전했습니다. 보수냐 진보냐 상관없습니다. 제대로 신학한 사람들은 무엇보다 감리교를 가능하게 하는 ‘거룩한 대화’(Holy Conferencing)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문제 해결에 있어서 과정(Process)과 지켜야 할 원칙(Protocol)을 존중합니다. 오늘 교단은 이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느 유대랍비가 “자기 자신이 성직자라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인간은 바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모든 성직자들에게 한 말입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이 뭐 그리 하나님 비슷한 것처럼 놀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국 감리교 초대 감독 Francis Asbury에게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가 1788년에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너는 도대체 뭔 생각을 하기에 너 자신이 감독이라고 불리우고 있느냐? 나에게 많은 사람들이 도둑놈이다 사기꾼이다 욕을 해도 괜찮지만 나는 그 누구라도 나를 감독이라고 부르는 것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감리교는 평신도 신앙운동으로 시작된 것이 ‘감독제도’로 인해 제도교회가 되었다고 연합감리교 역사위원회 Ashley Boggan 총무가 두 주 전에 모인 총감독회의에서 발언하면서 신앙운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도전했습니다. (5월 9일자 UM News)
교단이 어렵습니다. 후러싱제일교회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 어제 새벽기도 본문에 보니 하나님이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 다니엘이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미래를 알려고 애쓰지 말고 이미 주어진 말씀 잘 지키고 겸손히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 말씀이 위로가 됩니다. 미래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오늘 말씀 붙잡고 기도하면서 살아남아 두 눈 부릅떠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역사를 볼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