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아버지날입니다. 저는 아버지가 48년 전 돌아가셨습니다. 60년도에 신학 공부하신다고 미국 유학을 떠나셨고 1973년에 영주권 받으셔서 시카고에 이민 와서 비로소 가족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3년 후 추수감사주일 설교하다 뇌출혈로 쓰러지시고 그날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제가 결혼하려고 할 때 어머니가 반대하셨습니다. 이유를 여쭈니 “그 집 아버지가 없어서 그렇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도 아버지 없는데” 했더니 “그러니 장인이라도 있어야지 이놈아” 하셨습니다.
그렇게 양가 아버지 없이 준비한 결혼식은 식을 치를 돈도 없이 준비했습니다. 어머니는 신학교 다니면서 장가가겠다고 하는 대책 없는 아들이 기가 막혔을 것이고 장모님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전도사를 사위로 삼는다는 것이 한심한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양가 어머니 반대를 이겨내고 1981년 1월 3일 시카고 엄청 추운 날 결혼했습니다. 제가 결혼선물로 처가집에서 받은 것이 딱 하나 있는데 장모님이 세탁소에서 손님이 찾아가지 않은 양복 손질하셔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도 브랜드가 있는 양복이어서 폼 나게 입고 다녔습니다. 어머니는 가난해서 신부 반지도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 집안이라는 소리 듣기 싫다고 몇 년 월부로 작은 다이아 박힌 반지를 사다 주셨습니다. 결혼식 하려고 한 에반스톤 연합감리교회 목사가 부르더니 왜 신학생이라고 말하지 않았냐고 하면서 무료로 해주었습니다. 친구들이 김밥 말고 꽃은 도매상에서 사다 만들었고 사진은 선배가 찍어줬고 웨딩드레스는 캐나다 살던 처 숙모가 커튼 잘라 만들어줬습니다. 신혼여행도 두시간 거리 위스콘신에 갔다가 다음 날 돌아왔습니다. 돈이 없었습니다. 시카고에서 보스턴으로 돌아오는 길 $500주고 산 폭스와겐 미니밴에 히터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내복을 몇 겹 끼어 입고 중간에서 잘 형편이 되지 않아 그냥 달렸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모두 다 그렇게 없이 살았기 때문에 그러는 것 괜찮았습니다.
아버지와 살았던 날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돌아가신 지난 48년 저는 아버지를 늘 더 많이 그리워했습니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버지 일기를 통해 잘 알게 되었습니다. 생전에 목회하실 때 아버지 목회하는 작은 교회 창피하다고 말하던 불효가 커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대학 졸업하고 바로 신학교 가서 목사가 된 지 어언 43년이 넘었습니다. 지난 40년 가까이 통일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도 아버지 일기를 읽다가 홀로 월남하신 후 북의 가족을 하루도 빠짐없이 그리워하신 것 알고 돌아가신 후에라도 아버지 소원 이루어 드리려고 그런 것입니다. 결국 가족을 찾았고 할아버지 산소도 찾아냈습니다. 대단한 무슨 생각이 투철해서 통일운동한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도리를 하겠다고 나서다 보니 그리된 것입니다.
우리 집안 남자들 목회하다 모두 일찍 떠나셨습니다. 두 아버지 모두 47세에 천국 가셨습니다. 제 아내 외할아버지도 제 친할아버지도 평양에서 목회하셨는데 모두 50 초반에 천국 가셨습니다. 목사로서 제가 가장 장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저는 좀 오래 건강하고 장수 한참 누리게 하다가 데려가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사 아버지는 일찍 데려가셨지만 저에게 좋은 스승 목사님들 선배 목사님들을 주셨습니다. 좋은 교인들을 주셔서 여러모로 못나고 모자라는 저를 목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보스톤한인교회 부목시절부터 시카고대학목회, 한마음교회와 시카고대학교회 17년, 아틀란타한인교회 18년 그리고 현재 후러싱제일교회 9년 등, 지난 40년 넘는 목회 교인들이 제 스승이었고 형제자매요 아버지 어머니셨습니다.
오늘 아버지날인데 어느 자식도 선물 없고 먹을 것 주문해 주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행복합니다. 딸이 출장 간다고 오늘 오후부터 내일까지 손자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손자가 태어나고 처음 집에 온 날, 딸과 사위가 저에게 그 아이를 넘겨주었을 때 손자를 높이 들고 기도하면서 감사의 눈물을 쏟았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살아서 내 손자를 보셨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생각했습니다. 물론 아버지는 제가 장가도 가기 전에 떠나셨지만 새해가 되거나 명절 때 아이들에게 할아버지 만나러 간다고 하고 시카고 묘지에 가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아이들이 항상 “할아버지 어디 있어?”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지만 큰 딸아이가 대학에 갈 때 쓰는 에세이에 두 분 할아버지 묘비에 쓰여 있는 글을 주제로 썼습니다. 보지 못한 할아버지들이지만 자기에게는 자랑스런 할아버지들이라고 쓴 것을 보고 얼마가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내게 세월이 아무리 오래 흘러도 생각하면 그리움과 감사의 눈물을 흐르게 하는 부모님이 계셨음이 큰 행복과 축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