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마태 5:9에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peacemakers)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18에서 하나님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을 주셨다고 합니다. ‘화평, 평화’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나, 나와 이웃 그리고 나 자신과 내가 있어야 할 제자리를 찾는 것이 평화입니다. 화목은 그 화평을 이루는 역할입니다. 하나님과 나를 예수님이 화평의 관계로 만드신 것처럼 내가 그 일을 하는 것이 화목하게 하는 직분입니다.
저는 나이를 먹으면서 요즘 겨우 평화가 참 좋고 화목하게 하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는 것 깨닫게 됩니다. 20대 목회 초기 치열하게 세상을 바꾸기 위한 투쟁이 중요하다가 여겼습니다. 그래서 나는 옳고 의로운 편이라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30대 목회 썩은 교회 개혁해야 한다는 입장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니 나는 목회 바르게 한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40대는 교회 부흥시킨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되도록 하는 믿음으로 된다는 확신이 강했습니다. 50대 목회는 교회도 부흥시키고 정의 평화를 이루는 선교도 잘해 내가 대단하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60대 목회 들어서면서 코로나 사태는 물론 교단 분리 문제와 더불어 내가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무너지는 것도 보고 나라는 인간이 가지는 모순과 못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그 과정을 통해 평화를 알게 되었고 화목케 하는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화가 나는데 참아야 했고 힘드니 바닷가에 나가 하루에 10마일씩 걸어야 해서 건강이 좋아졌습니다. 무릎 꿇지 않으면 안되니 새벽기도가 부담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무엇보다 나만 옳고 의롭다는 생각 사라졌습니다. 나라는 인간을 그렇게 못된 목사로 여기는 사람들이 진짜 있다는 것이 처음에는 분했는데 나를 돌이켜 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내 주변에 많았던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섭섭했는데 나를 돌보고 내 목회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내 능력의 한계를 보게 되니 목회 본질에 집중하게 됩니다. 기도 제목이 아주 단순해졌습니다. 허리 아픈 교인들이 많으니 “하나님 허리뼈를 견고케 하시옵소서!” 기도합니다. 암에 걸린 분들이 많으니 “하나님 치유의 광선을 강하게 내리사 시커먼 암세포 다 소멸케 하시고 건강한 세포가 왕성케 하시옵소서!” 합니다. 내가 들어도 내 기도가 웃음이 나올 정도로 노골적입니다. “하나님 우리 교인들 먹고 사는 생업과 사업이 잘되게 하셔서 미국에서 십일조 가장 많이 내는 사람들이 후러싱제일교회에서 나오게 하시옵소서!”
평화를 이루려면 하나님이 보게 하시는 것 보고 깨닫게 하시는 것 깨달아야 합니다. 화목케 하는 일 하려면 자기만 옳고 의롭다는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리가 없으니까요. 가난한 심령, 간절한 목마름이 있으면 하나님을 찾게 되니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것이나 잘난 체 하는 재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시카고에서 부목사로 있었을 때 어느 날 곽노순 목사님이 “다음 주부터 안 나와도 된다” 하산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한번도 뵌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목사님이 하셨던 말씀들이 소록소록 생각납니다. 그 어른이 ‘내가 누구이기에 남의 마당을 쓸까?’라는 글에서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남과 갈등이 생기면 나는 내 속만을 들여다본다. 내게 욕심이 동했던가?… 남들은 나를 오해할 권리가 있고 나는 해명할 의무가 없다. 살기도 짧은 생이거늘 어찌 주(註)를 붙이며 가랴? 내가 누구기에 남의 마당을 쓸까?”
첫 스승이신 홍근수 목사님이 교인총회 때 너무 억울하게 모함당하셨기에 목사님을 위로한답시고 목사님 괴롭힌 인간들에 대해 강도 높은 욕을 했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이 저를 물끄러미 보시더니 “우리 교인들이 모두 성자라면 너나 나나 왜 목사로 필요하겠니. 그러지 마라. 나는 힘들어서 그 사람들 보고 싶지 않지만 부목사인 너라도 그 분들 따듯하게 대해라” 하셨습니다. 두 분 목사님 모두 40대 중반이셨고 저는 20대 중반이었습니다. 저는 60대 후반에나 이르러 그 어른들이 하셨던 말씀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됩니다. 내가 먼저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는 것이고 그리해야 화목하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