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3,000명이 들어가는 예배당 건축을 끝내고 60살에 남미 선교사로 떠나는 미국 목사에게 제가 “미쳤어요?”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 교회에 처음 왔을 때 10명이었는데 지금 6,000명이다. 그런데 교인들이 어느 때부터인지 예수님 이야기보다 내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

지난 세월 제 목회 가장 큰 반성도 예수님 이야기보다 내 교회와 교단 이야기를 많이 한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젊은 목회자들이 찾아와서 교단 이야기를 하기에 이야기 주제를 바꿔보라고 제안했습니다. 폴 틸릭이란 신학자가 하나님에 대한 정의를 ‘궁극적 관심’(the Ultimate Concern)이라 했습니다. 우리 이야기의 궁극적 관심이 하나님 기쁨과 영광, 예수 십자가 사랑과 은혜 그리고 성령의 능력이어야 합니다. 교단 이야기 많이 하다 보면 교단을 하나님으로 착각하는 위험에 빠집니다.

40여 년 전 어느 교회 문에 “난 더 이상 여기에서 하나님 말씀 전하지 않습니다”라는 글을 붙이고 떠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훗날 제가 그 어른이 개척하신 교회 부목사로 사역하게 되었을 때 그 일에 대해 여쭈었더니 “자네는 돼지에게 진주를 계속 던져주겠는가?” 하셨습니다. 교회 창립주일이 가까이 왔는데 “샤론 감리교회는 더 이상 교인 안 받습니다”는 내용으로 광고를 내라고 하셨습니다. 교인이 70명 넘어가니까 하나님 말씀 전하는 것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어 그렇다 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에 대해 목사님이 교만하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다음 주일부터 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쫓겨 난 후 그 목사님의 절친이시고 내 첫 목회 스승이신 홍근수 목사님께 그 곽목사님 교만하다고 성토를 했습니다. 저를 물끄러미 보시던 홍목사님이 “너는 아직 곽노순을 평가할 수준이 되지 못한다.” 짧게 한마디 하셨습니다. 지금도 두 어른의 가르침이 많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지난 세월 나름대로 교회 부흥시킨다고 열심히 목회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것으로 분주했지만 진정 그 중심에 예수의 말씀과 복음의 본질이 얼마나 있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내가 뭘 잘해보려고 애를 쓸수록 영적 깊이는 얕아지고, 공동체 안에는 공허함과 분열, 피로가 많았습니다.

리차드 포스터는 ‘영적 훈련의 기쁨’에서 현대인을 사로잡고 있는 세 가지 영적 질병을 ‘조급함(hurry)’, ‘분주함(busyness)’, 그리고 ‘시끄러움(noise)’이라 말합니다. 이 세 가지는 영혼을 병들게 하는 죄이며, 내면의 삶을 파괴하는 힘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조급한 영혼은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침묵 없는 영혼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리차드 로어 역시 이 시대를 “깊이 없는 시대”라 말하며, 내면의 침묵과 고요를 상실한 인간은 점점 더 자아에 갇혀 영적 시야를 잃어버린다고 경고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려 하고, 소리를 내고, 반응하려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 가운데 말씀하신다.”

오늘날 교회가 싸워야 할 가장 중요한 전쟁터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입니다. 그 내면이 조급함과 불안, 시끄러움으로 가득할 때, 성령의 인도하심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임재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주님, 우리가 진짜로 집중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내 마음이 시끄러우니 침묵을 주소서. 분주하니 멈추게 하소서. 조급하니 기다림의 은혜를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