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십자가 죽음은 내가 죽을 죄를 주님이 대속하신 구원 역사이고 부활은 죽음의 권세를 이긴 하나님 사랑의 승리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를 비교하면 가톨릭은 예수님 죽으신 성금요일을 너무 중요하게 여겨 부활의 기쁨에 제대로 이르지 못하는 면이 있고, 개신교는 성금요일을 건너 뛰고 부활의 기쁨에 너무 빨리 이른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가톨릭은 자기 가슴을 치며 “mea culpa, mea culpa, mea maxima culpa”(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나의 가장 큰 탓이로소이다”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로 인해 십자가 앞에서 자기 성찰의 깊이가 있지만 예수 믿는 기쁨이 보다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개신교는 자기 성찰은 잘 못하면서 믿음의 능력이나 축복에 욕심부리는 영적인 가벼움의 문제가 지적됩니다.
제가 오랜 세월 가깝게 교류한 목사들은 주로 감리교와 성결교, 그리고 장로교단 중에서는 기장과 합동측 이었습니다. 그런데 애틀랜타에 있을 때 가톨릭 예수회 신부들과 교제 할 기회가 있었고 뉴욕에 와서는 침례교, 순복음, 장로교 합동측 등 보다 보수적인 분들과 교제를 하면서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교회력 설교를 하고 중요한 기독교 절기를 따르는 것은 성경은 물론 예배 전통의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신앙경험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성회수요일이나 성금요일 기도회를 하면 가톨릭 같다고 불편해 하는 교인들이 가끔 있습니다. 예전이 없는 교단에서 신앙생활을 한 분들입니다. 음식도 골고루 먹어야 몸에 좋고, 계절도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있는 것이 건강에 좋습니다. 인생도 사계절을 경험하면서 성숙해지고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연합감리교회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4 원칙’(성경, 전통, 이성, 경험)이 조화를 이루는 성숙한 신앙인데 교단분리의 과정에서 보인 것은, 신학적으로 성숙하지도 못하고 신앙적으로 건강한 조화가 없는 문제였습니다. 자기 성찰을 통해 자기 죄를 보지는 않고 남의 죄만 들춰내는 바리새적인 민낯이 드러났고 교단이 분열되었는데 애통해하지 않고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 없어졌다고 자축하는 가벼운 모습을 보아야 했습니다.
한국이나 미국 정치 현실도 나라가 잘되고 국민이 잘 사는 길을 찾는 정책이 아니라 정치 이념 투쟁을 위한 양극화를 벗어나지 못하면 나라 망하게 하는 짓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한 가톨릭이 내놓는 입장에 비해 개신교가 양극화를 조장하는 일을 잘하는 것은 자기성찰의 부재로 인한 자기 세력 과시를 부끄러운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전혀 예수님 가르침에 가깝지 않으면서도 하나님 잘 믿는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주님 십자가 앞에서 자기 성찰이 없으면서 남의 잘못과 죄에 관심이 많으면 바리새인 되는 첩경입니다. 예수 부활의 기쁨이 없으면서 금욕적 신앙에 빠지면 예수님을 통해 일어나는 구원의 역사를 보지 못한 세례 요한의 요단강 경건주의 에세네파(Essenes)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달리 시장 바닥에 들어가서 죄인들과 먹고 마시고 아픈 사람들 고치고 소외된 인간들 하나님 사랑받는 존재임을 확인시켜 주는 하나님 나라 축제를 즐기셨습니다.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성금요일 우리의 죄를 주님 십자가에 못 박을 것입니다. 토요일 우리가 죽은 무덤에 주님이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새벽 무덤 문이 열리고 주님이 다시 살아나시고 우리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요한 1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