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밥을 같이 먹어 보면 됨됨이를 안다고 합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에게는 잘하면서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을 무례하게 대하는 사람과는 사귀지 말라고 합니다. 힘있고 돈 있는 사람에게는 잘하면서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사람 믿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가정이나 교회에도 이런 문화와 가치관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 동생들이 초막절에 예수님에게 갈릴리 촌구석에 있지 말고 예루살렘에 가서 실력 발휘하라고 강요를 한 것도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갈릴리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고 아픈 사람들 고치시는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갈릴리로 가셨고 제자들에게 사마리아로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교회가 사는 길이 있습니다. 높은 곳은 천국만 바라볼 뿐이고 교회는 낮은 곳으로 가서 ‘희년 목회’(누가 4:18)를 해야 교회가 교회로서 제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어제 어느 교계 신문에 ‘교단이 필요 없는 시대가 도래하나?’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로 예배당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소홀하게 되고 인터넷을 통해 연결된 신앙공동체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단이나 교회의 필요성에 대한 질문이 존재 목적에 초점을 맞춰야지 실용가치로 판단되는 것은 위험합니다. 우리 교회가 속한 교단도 교단분리 이후 분골쇄신의 자세로 교회를 살리는 것에 집중해야 하는데 교단 권력 중심 지향적이 되는 우려가 있습니다. 목사들이 섬기는 교회를 살리는 일보다 교단 프로그램에 동원되는 일이 너무 많고 낮은 곳으로 하방 연대를 해야 하는데 감독 감리사를 높은 곳으로 여기도록 만드는 것이 문제이지 교단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변방을 찾아서’(신영복)를 보면 인류사는 언제나 변방이 역사의 새로운 중심이 되어 왔고 창조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진정 변방이 창조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콤플렉스가 없어야 하는데 중심부에 대한 열등의식이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권력의 중심인 예루살렘에 대한 열등의식을 버리고 갈릴리에 대한 소망과 사랑 그리고 자긍심을 가져야 합니다. 중심부에 대한 허망한 환상과 콤플렉스를 청산하지 못하면 변방은 중심부보다 더욱 완고하고 교조적인 틀에 박힌다고 지적을 합니다. 높은 사람들, 잘난 사람들, 권력 가진 사람들 부러워하는 콤플렉스 버려야 합니다.
제가 싫어하는 것이 먹을 때 사람 차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급 식당보다 대중식당을 선호합니다. 저렴해야 누구나 편하게 함께 먹고 마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점심때 사역자들이 교회에서 공동 식사를 합니다. 그러니 식사 시간에 누구라도 오면 숟가락 하나 더 놓고 같이 먹을 수가 있습니다. 담임목사라고 더 좋은 것 먹지 않습니다. 가끔 제가 욕심을 부리는 음식이 있기는 합니다. 비지찌개입니다. 비지가 메뉴일 때는 제가 좀 많이 달라고 합니다. 아내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제육볶음 같은 것은 젊은 목사들이 더 먹도록 양보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집요하게 예수님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 시비를 걸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 차별 없이 소외된 사람들과 죄인들과 먹고 마시기를 좋아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문제 삼은 것 다른 것 아닙니다. 예수님과 밥을 먹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볼 때 행복하면 안되는 사람들인데 행복한 것이 못마땅한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 잘 믿는다고 하지만 행복하지 않은데 예수님과 밥 먹는 사람들은 천국 잔치 기쁨 가득하니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서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김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