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종려주일 아침인데 시끄러운 소리가 났던 적이 있습니다. 성가대가 예배당에 노래 부르며 흔들고 들어갈 종료나무 가지를 목회실이 구입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부목사들이 대역 죄인 된 모습으로 쩔쩔매고 성가대장 장로는 소리를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예배의 진정한 목적보다 그런 것 중요하게 여기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나무가지 흔드는 거 예배에 그리 중요한 것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우상숭배하는 사람들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신주단지처럼 되어버린 교회가 많습니다.

중국 문화혁명 때 마오쩌뚱이 지식인들을 잡아 죽이는 일에 홍위병들을 앞장 세웠습니다. 아직 덜 자라난 중고등학생들입니다. 흑백이론을 넘어서는 지식 세계를 이해할 능력이 안되는 아이들을 앞세워 공산혁명에 방해되는 지식인들을 반동으로 몰아 잡아 죽이는 일을 했습니다. 캄보디아 폴 폿 역시 안경을 끼거나 가운데 손가락에 굳은 살이 박혔다거나 책을 읽고 펜을 잡은 사람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이런 현상이 중세기 로마 가톨릭이 유대인 대학살 할 때와 같습니다. 똑같은 짓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했습니다. 오늘날 자기들의 사상과 이념에 동조하지 않으면 쉽게 죽여도 된다고 여기는 것이 그것입니다.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흑백이론과 단순 논리로 군중을 잘 선동하는 사람들이 교계를 주름잡고 신학교 교육이 홍위병 만드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것 잘하는 사람들이 정치권과 결탁하는 아주 악한 조합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 십자가 죽음에 앞장 섰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파가 오늘날 교계의 문제와 흡사합니다.

저는 뉴욕에서 목회하시는 한준희 목사님의 글이 페북에 올라오면 언제나 ‘좋아요’를 누릅니다. 정직한 고민의 글을 올리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는 “처음 예수를 믿던 시절에는 예수에 미쳐 죽어도 좋다는 말까지 했는데 목회를 한 지 30년이 지나가는데 도무지 예수에 미친 사람이 안된 것 같아 정말 미치겠다. 마지막 인생을 예수 부활에 미쳐보고 싶다”는 내용의 글을 올리셨습니다. 정직한 자기 성찰입니다. 제가 설교세미나를 할 때 꼭 하는 말이 “질문을 모르면서 정답을 주려고 하는 직업병을 고치라!”는 것입니다. 자기 모습을 성찰하지 않으면서 영적인 교만과 종교적 의로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아들 예수 안 믿는 처녀를 만나 결혼하게 되어 감사하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무슨 기막힌 말인가요? 다른 것 아닙니다. 정직한 자기 성찰이 없는 못난 예수쟁이들의 ‘홍위병’ 기질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전도의 문이 막히는 것이 이런 푼수같은 사람들과 내용은 없으면서 종교적 교만 가득한 바리새인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진짜 무서운 사람들은 이런 ‘홍위병’들을 선동에 앞장 세우고 정치권과 결탁하는 악한 세력입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똑같은 일들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예수님 말씀 깊이 생각하고 예수님 십자가 고난과 죽음에서 우리가 죽어야 할 것들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거듭나야 합니다. 죽음의 세력에 휘둘리거나 짓눌리지 말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더 이상 교회가 못나고 못된 인간들이 마음대로 하는 놀이터가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예수님이 목적하신 하나님 나라의 현존이 되어야 합니다.

나치 독일이 ‘히틀러 청소년단’(Hitler Youth)을 만들어 히틀러를 신봉하는 ‘홍위대’ 삼았을 때 칼 바르트나 본 훼퍼 목사와 같은 분들이 세운 ‘고백교회’에서는 견신례(Confirmation)를 철저하게 가르쳤습니다. 어른이나 어린이들이나 핍박을 각오하고 예수 믿은 것입니다. 진정 교회가 교회 되고 진짜 예수 잘 믿는 것이 절실한 때입니다.

예수님이 로마제국 군인이 타는 말이 아니라 나귀를 타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오셔서 우리의 아픔과 고난 속으로 들어 오셨고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 십자가 예수를 ‘힘과 권력을 가진 메시아’를 기다렸던 유대인들은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십자가 예수가 하나님 사랑의 완성이요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부활의 새벽을 기다립니다.